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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기관 , 문화·예술

기록 백서 다음 해를 염두에 두고 만듭니다

해마다 이어지는 기록의 조건

한 권이 아니라 다음 권까지 생각하는 설계

기록 백서

대부분의 백서는 한 번 만들고 끝납니다. 10주년이나 20주년처럼 특정 시점을 기념해 발간되고, 다음 권은 몇 해 뒤에나 나오죠.

그런데 해마다 이어서 만드는 책도 있습니다. 문화재나 유산처럼 관리 대상 자체를 정리하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올해 조사하고 관리한 내용을 한 권으로 묶고, 이듬해에 같은 작업을 다시 반복합니다.

이런 기록 백서는 만드는 방식이 다릅니다. 올해 한 권을 잘 만드는 것보다, 다음 권과 그다음 권까지 같은 형태로 이어질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거든요.

서울의 한 자치구가 해마다 펴내는 문화재 관리 백서가 그런 경우였습니다. 관리 대상 문화재 57개를 154페이지에 담은 책이었어요.

성과가 아니라 대상을 남깁니다

일반적인 백서는 기관이 무엇을 했는지를 남깁니다. 어떤 사업을 했고 어떤 성과가 있었는지가 중심이죠.

기록 백서는 다릅니다. 남기려는 것이 기관의 활동이 아니라 대상 그 자체입니다. 문화재 한 점 한 점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으며 어떤 상태인지가 본문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래서 서술의 주어가 달라집니다. 기관이 무엇을 했다가 아니라, 이 유산이 어떠하다는 문장이 이어집니다. 백서 아카이빙이라는 말이 붙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과 보고보다 자료 축적에 가까운 작업이니까요.

이 차이는 목차에서부터 드러납니다. 사업별로 나누는 대신 대상별로 나열하게 되고, 항목의 순서는 모든 대상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백서 아카이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책의 수명은 발간 시점이 아니라 그 이후에 시작됩니다. 몇 해가 지나 누군가 특정 대상을 확인하려 할 때, 그때 펼쳐지는 것이 이 기록이니까요.

고정할 것과 열어둘 것을 나눕니다

해마다 이어지는 책이라면 무엇을 고정하고 무엇을 열어둘지 먼저 정해야 합니다.

고정하는 쪽은 판형과 항목 구성, 대상 하나에 배정하는 분량입니다. 이 세 가지가 그대로 유지되어야 몇 년 치를 나란히 놓았을 때 같은 시리즈로 보입니다.

항목의 순서를 고정하는 일은 생각보다 큰 차이를 만듭니다. 매년 같은 자리에 같은 정보가 있으면 여러 해 치를 나란히 놓고 비교하기가 쉬워지거든요. 백서 아카이빙에서 형식의 일관성이 내용만큼 중요한 이유입니다.

분량 기준도 미리 잡아둡니다. 자료가 풍부한 대상과 그렇지 않은 대상이 섞이기 마련인데, 한쪽만 길게 쓰면 지면에서 중요도의 차이처럼 읽힙니다. 조사된 정보의 양과 대상의 가치는 다른 문제니까요.

열어두는 쪽은 대상의 수와 전체 페이지입니다. 관리 대상은 해마다 늘거나 줄 수 있고, 새로 지정되는 것도 생기거든요. 처음부터 페이지 수를 못 박아두면 다음 해에 곤란해집니다.

이 책이 210×270mm라는 큰 판형을 택한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대상 하나에 사진과 설명, 위치 정보가 함께 들어가야 하는데 판형이 작으면 항목을 줄여야 합니다. 한 번 줄인 항목은 다음 해에도 되돌리기 어렵습니다.

이름과 지정 상태는 임의로 쓸 수 없습니다

기록 백서에서 특히 조심해야 하는 부분입니다. 대상의 공식 명칭과 지정 상태를 임의로 바꿔 쓸 수 없거든요.
읽기 편하게 줄여 쓰거나 익숙한 이름으로 바꾸면 나중에 다른 자료와 대조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기록으로 남는 문서인 만큼 공식 표기를 그대로 따르는 편이 안전합니다.

지정 상태가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 책에 실린 한 가옥은 등록문화재에서 해제된 뒤 서울 미래유산으로 다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었어요. 지금 상태만 적으면 그 사이의 이력이 사라집니다.

그래서 변경된 내역까지 함께 적었습니다. 해마다 쌓이는 기록이라면 무엇이 언제 어떻게 달라졌는지가 오히려 더 중요한 정보가 되기 때문입니다.

표기 기준은 첫 권에서 정해두는 편이 좋습니다. 뒤늦게 규칙을 바꾸면 이전 권과 표기가 어긋나, 여러 해에 걸친 기록이 하나로 묶이지 않게 됩니다.

디자인이 대상보다 앞서지 않게

기록 백서의 디자인은 눈에 띄지 않아야 합니다. 주인공이 책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대상이니까요.

이 책의 컨셉을 정갈함으로 잡은 것도 그래서입니다. 화려한 장식이나 강한 색을 쓰면 대상보다 지면이 먼저 보이게 됩니다.

후가공도 같은 기준으로 정했습니다. 광이 나는 코팅은 정갈한 인상을 해칠 수 있어 무광으로 마감했어요. 표지에는 관리 대상 중 한 점만 대표 이미지로 올리고 나머지 요소는 최대한 덜어냈습니다.

제작 과정이 궁금하신가요?

절제된 디자인은 해마다 이어가기에도 유리합니다. 유행을 탄 디자인은 몇 해 뒤에 어색해지지만, 담백한 지면은 오래 견디거든요.

기록 백서 제작

소량이어도 제대로 만드는 이유

이 책은 33부만 인쇄했습니다. 널리 배포하는 홍보물이 아니라 관계 기관과 자료실에 비치하는 자료거든요.
부수가 적다고 해서 대충 만들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에 가깝습니다. 몇 부 되지 않기 때문에 한 권이 오래 남고, 나중에 찾아보는 사람에게는 그 한 권이 유일한 자료가 되니까요.

이 기록 백서가 담은 대상은 모두 57개였습니다. 하나하나 분량은 길지 않아도, 같은 기준으로 정리된 항목이 쌓이면 그 자체로 쓸모 있는 자료가 됩니다.

기록 백서는 지금 읽힐 책이 아니라 나중에 찾아질 책입니다. 올해의 완성도보다 몇 해 뒤에도 같은 기준으로 읽히는지가 더 중요한 이유입니다.

해마다 이어지는 기록을 준비하고 계시다면, 첫 권을 만들기 전에 무엇을 고정할지부터 정해보시길 권합니다. 그 기준이 다음 권을 훨씬 수월하게 만들어줍니다.

다른 백서 이야기가 궁금하시다면, 아래에서 이어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기관마다 다른 백서가 어떤 이야기로 완성되는지 그 과정을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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