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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문화재단 백서 기획 과정, 감성을 설계하다

백서 기획으로 이야기를 만드는 과정

방대한 자료 대신, 감성을 먼저 설계했습니다

영등포문화재단 백서 기획

오랜 시간 활동해온 기관일수록 그 발자취를 정리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해마다 쌓여온 사진과 문서, 담당자가 바뀌면서 흩어진 기록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손대기 어려운 존재가 되곤 하거든요. 백서 작업을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도 바로 이 방대하고 정리되지 않은 자료들입니다.

영등포문화재단도 마찬가지였어요. 담당자님이 자료 폴더를 열어 보이셨을 때, 솔직히 눈앞이 캄캄했어요. 오랜 시간 쌓인 사진과 문서가 폴더 수십 개에 흩어져 있었거든요. "이걸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 한마디가 이번 백서 기획의 출발점이었습니다.

자료 속에서 이야기를 찾다

10년 넘는 시간이 쌓이면 자료도 함께 쌓입니다. 문제는 양이 아니라 방향이었어요. 어떤 자료를 살리고 어떤 자료를 덜어낼지 기준이 없으면 정리 자체가 불가능하거든요. 먼저 연도별로 자료를 나누고, 그 안에서 다시 문서와 이미지를 구분했습니다. 문화예술 재단 특성상 사진 비중이 유독 컸어요. 앨범처럼 흩어진 사진들을 한 장 한 장 넘기면서 어떤 장면이 남을 가치가 있는지 골라내는 작업이었습니다.
자료를 훑어보다 보니 하나의 흐름이 보이기 시작했어요. 재단이 걸어온 길, 지금 하고 있는 활동, 그리고 앞으로 그리는 방향. 이 세 가지가 자연스럽게 나뉘더라고요. 그래서 과거·현재·미래라는 큰 틀로 이야기를 짜기로 했습니다. 부서별로 흩어진 자료도 이 틀에 맞춰 다시 취합했고요. 하나의 타임라인 위에 재단의 10년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이 단계에서 담당자님과 여러 차례 미팅을 가졌어요. 어떤 사업을 앞세울지, 어떤 사진을 대표 이미지로 쓸지 하나하나 의견을 맞춰갔습니다. 방대한 자료를 다루는 만큼 혼자 판단하기보다 재단 내부의 시선을 계속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거든요. 그렇게 몇 차례 조율을 거치고 나서야 전체 목차의 뼈대가 잡혔습니다.

딱딱함 대신 감성을 택하다

백서라고 하면 보통 성과 나열, 숫자 중심의 딱딱한 구성을 떠올리기 쉬워요. 하지만 이번 프로젝트는 달랐습니다. 재단이 지역 주민과 함께 성장해 온 이야기였거든요. 숫자보다 사람이 먼저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컬러 콘셉트부터 다르게 잡았어요. 핑크였습니다. 재단 이미지와 어울리면서도 따뜻함을 전할 수 있는 톤이었어요. 표지 시안을 몇 차례 바꿔가며 논의했는데, 결국 사진보다 글자를 주인공으로 세우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지역 주민들과 만나온 시간을 문장 대신 손글씨 느낌의 타이포그래피 한 줄로 압축한 거예요. 딱딱한 고딕 대신 부드럽게 흘러가는 서체를 써서, 멀리서 보기만 해도 편안한 인상을 주도록 했습니다.

내지 작업에서는 정보 위계를 잡는 데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사진 자료가 워낙 많다 보니 반복적인 배치는 피하고, 페이지마다 조금씩 다른 레이아웃을 시도했어요. 제목과 본문의 크기 차이를 분명히 하고, 여백을 충분히 남겨 가독성을 살렸습니다. 사진 한 장 한 장이 자기 이야기를 하도록 배치에 신경 썼어요.

영등포문화재단 백서 내지

종이와 후가공으로 완성한 감성

기획 방향이 정해지고 나면, 그 감성을 실제 종이로 옮기는 작업이 남습니다. 용지 샘플을 여러 장 대보면서 고민했는데, 표지엔 랑데부 240g을, 내지엔 백색 모조지 120g을 최종적으로 낙점했어요. 발색이 화려한 스노우지 대신 모조지를 택한 이유는 하나예요. 색이 튀지 않고 차분히 가라앉아야 이야기가 더 진하게 읽히거든요.

과거·현재·미래를 나누는 경계도 종이로 표현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각 파트 사이에 형광 핑크 별색 간지를 한 장씩 끼워 넣는 북인북 구성을 제안했습니다. 사이즈를 본문보다 조금 줄여서, 손으로 책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다음 챕터가 시작된다는 걸 감각적으로 느끼게 했어요. 표지 마감도 신경 썼습니다. 무광코팅 위에 투명 홀로그램박으로 포인트를 줘서, 빛의 각도에 따라 핵심 문구가 은은하게 반짝이도록 했고요. 페이지가 자연스럽게 넘어가야 사진과 텍스트가 끊기지 않아 무선날개제본을 최종 선택했습니다.

기획이 곧 이야기가 되는 순간

백서를 만들다 보면 늘 느끼는 게 있어요. 좋은 백서는 자료를 얼마나 많이 담았는지가 아니라, 그 자료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는지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영등포문화재단 백서는 방대한 자료를 세 갈래 이야기로 정리하고, 거기에 감성이라는 옷을 입히면서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기획 단계에서 방향을 제대로 잡아야 디자인도, 인쇄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자료를 고르는 순간부터 종이를 고르는 순간까지, 모든 선택이 결국 하나의 감성으로 모였던 프로젝트였습니다.

완성된 백서를 처음 받아 보신 담당자님은 딱딱할 줄로만 알았던 재단 이야기가 이렇게 따뜻하게 읽힐 줄 몰랐다고 하셨어요. 그 한마디에 그동안의 자료 정리, 목차 조율, 컬러 선택이 모두 헛되지 않았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기획이 탄탄하면 디자인은 자연스럽게 뒤따라온다는 걸, 이번 프로젝트로 다시 배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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