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서 기획, 방대한 원고를 지면에 앉히는 법
받은 원고가 그대로 책이 되지는 않습니다
백서 기획이 원고와 지면 사이에서 하는 일
백서 제작 의뢰가 들어오면 발주처에서 원고를 보내옵니다. 대개 워드나 한글 파일에 글이 이어져 있고, 관련 이미지가 폴더에 따로 담겨 있죠. 담당자 입장에서는 필요한 내용을 다 정리해 넘긴 셈입니다. 그런데 이 파일을 그대로 지면에 흘려 넣으면 책이 되지 않습니다. 글은 있지만 읽는 순서가 없고, 이미지는 있지만 어디에 놓일지가 정해져 있지 않거든요.
이 간극을 메우는 것이 백서 기획입니다. 원고를 받았다고 해서 바로 지면에 들어갈 수 있는 게 아니라, 한 번 더 손을 거쳐야 비로소 책의 재료가 되거든요. 한국의 데이터 산업 전반을 다룬 백서를 제작할 때도 그랬습니다. 넘어온 원고의 분량이 상당했는데, 그 자체로는 아직 재료였어요. 오늘은 백서 기획 단계에서 그 재료를 지면에 앉히기까지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받은 원고는 아직 초안입니다
초안 원고는 대체로 글과 이미지, 두 덩어리로 되어 있습니다. 백서 기획의 첫 작업은 이 덩어리에서 뼈대를 찾아내는 일이에요. 긴 문단을 읽어가며 각 대목의 중심 내용을 뽑아 제목으로 세우고, 그 제목 아래 어떤 문장이 남고 어떤 문장이 빠질지를 정합니다. 이 과정을 거치면 같은 내용이라도 훑어보기만 해도 무슨 이야기인지 잡히는 형태가 됩니다.
제목을 세우는 기준도 필요합니다. 그 대목에서 가장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먼저 정하고, 그것을 짧은 문장으로 압축하는 식이에요. 원문에 있는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면 길어지는 경우가 많아 대개는 다시 씁니다. 이미지도 이때 자리를 찾습니다. 폴더에 모여 있던 사진과 도판을 본문 어느 대목에 붙일지 정하는 건데, 단순히 빈 곳에 채우는 게 아니라 그 문장이 설명하는 장면과 맞아야 합니다. 제목을 세우고 이미지를 앉히고 나면 비로소 읽는 흐름이 생깁니다. 텍스트를 다듬는 교정 작업도 이 단계에서 함께 이뤄지고요. 여기까지가 백서 기획에서 지면 작업에 들어가기 전에 반드시 지나야 하는 구간입니다. 이 단계를 건너뛰면 나중에 지면을 다 짜놓고 다시 원고로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 생깁니다.
페이지가 아니라 펼친 면으로 봅니다
원고가 정리되면 지면에 앉히기 시작합니다. 이때 기준은 한 페이지가 아니라 펼쳤을 때 보이는 두 면이에요. 독자가 책을 볼 때 실제로 마주하는 단위가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주제가 왼쪽에서 시작해 오른쪽에서 끝나면 흐름이 자연스럽지만, 오른쪽 끝에서 잘려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맥이 끊깁니다. 그래서 주제마다 필요한 분량을 미리 가늠하고 어디서 시작해 어디서 닫을지를 계산합니다. 표나 다이어그램처럼 자리를 많이 차지하는 요소가 들어가는 대목은 더 신경 써야 하고요. 분량이 애매하면 문단을 나누거나 합쳐 조정하는데, 이때 내용이 어색해지지 않도록 문장을 다시 손보기도 합니다. 이런 시각 요소는 데이터를 빠르게 전달하는 장치이면서 동시에 지면을 크게 차지하는 요소라, 배치 위치에 따라 앞뒤 흐름이 통째로 달라집니다.
남는 페이지도 설계의 일부입니다
이렇게 맞춰가다 보면 반드시 생기는 상황이 있습니다. 페이지가 남는 경우예요. 백서는 전체 쪽수를 맞춰야 하는데, 주제마다 담기는 분량은 제각각이라 어딘가에서 여백이 생깁니다. 여백이 생기는 이유는 단순합니다. 주제 하나를 두 면에 담으려니 조금 모자라고, 세 면으로 늘리자니 남는 식이죠. 전체 쪽수는 인쇄와 제본 조건에 맞춰 정해지는 값이라 마음대로 늘리거나 줄일 수도 없습니다.
이럴 때 쓸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내용을 양쪽으로 분산하는 것입니다. 한쪽에 몰려 있던 문단을 나누고 여백을 고르게 재배치하면 지면이 안정됩니다. 다른 하나는 그 자리에 관련 일러스트나 아이콘을 채우는 것이고요. 억지로 글을 늘리는 것보다 시각 요소를 넣는 편이 읽는 사람에게도 부담이 적습니다. 여백 자체를 살리는 방법도 있습니다. 정보가 빽빽한 구간이 이어졌다면 오히려 비워두는 편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는 호흡을 만들어주거든요. 남는 페이지를 어떻게 다루느냐는 백서 제작의 완성도를 가르는 지점 중 하나입니다. 여기서 대충 넘어가면 어느 대목만 유독 비어 보이거든요.
한 팀에서 끝까지 가는 이유
여기까지 보면 백서 기획이 왜 디자인과 떼어놓기 어려운 작업인지 드러납니다. 제목을 뽑는 일은 원고의 영역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지면 구성과 맞물려 있고, 남는 페이지를 채우는 일은 디자인처럼 보이지만 내용을 알아야 판단할 수 있으니까요.
백서 기획과 디자인, 인쇄까지 한 팀에서 이어가면 이 판단이 한 자리에서 이뤄집니다. 원고를 다듬은 사람이 지면을 짜고, 지면을 짠 사람이 인쇄 사양을 정하니 중간에 의도가 새지 않거든요. 반대로 단계마다 담당이 바뀌면 앞에서 정한 기준을 뒤에서 다시 설명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처음 잡았던 흐름이 흐려지기 쉽습니다. 표지도 마찬가지예요. 이번 백서는 주제에 맞는 그래픽 요소로 정체성을 잡고 입체 구도로 시선을 끌되, 색은 키 컬러 하나만 써서 제목이 묻히지 않도록 했습니다. 이런 결정도 안에 담긴 내용을 알고 있어야 나옵니다. 백서 제작에서 업체의 역량 차이가 결과물로 드러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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